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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본질은 호기심 : 나르시시즘은 사랑을 막는다 : 사랑에 대한 설명

빨간노트 2022. 10. 4. 0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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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본질은 호기심이다. 무언가를 바라거나 기대하는 관계는 사랑으로 볼 수 없다.

사랑의 본질은 호기심

호기심은 이성적인 판단에 의해 이뤄지는 것이 아니다. 감정적(또는 본능적)인 ‘반응’인 것이다. 사유하기 전에 일어나는 것이 호기심의 특성이다. 이는 사랑의 특성과 비슷하다.

다만 사랑은 한눈에 반한다는 개념의 호기심과는 거리를 두어야 한다. 한눈에 반한다는 개념은 대상에 대한 관심보다는 외적인 모습에 대한 성적인 반응에 가깝기 때문이다.

호기심은 관심과 동일어로 사용되기도 한다. 관심이 사그라듬은 사랑이 사그라듬으로도 볼 수 있다.

호기심은 예측 불가하며 불안정하다. 대상에 대한 호기심은 언제 사그라들어도 전혀 이상하지 않다. 그렇기에 사랑은 불안함을 낳는다. 안타깝게도 불안함은 사랑이 지속됨에 전혀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이러한 사랑의 성질을 인정 못한 채 바꾸려들 때 갈등이 생겨난다.

외로움은 사랑을 착각하게 만드는 요인이다. 외로움은 사회적 교류가 필요한 인간이 그러하지 못했을 때 발생하는 일련의 신경반응에 가깝다. 이 경우, 관계 맺을 이를 바라는 신경반응을 사랑으로 착각할 수 있다. 상대방이 필요하다고 느끼는 관계라면 이는 사랑보다는 외로움에 가깝다고 볼 수 있다.

상대방을 알고 나서 정이 떨어졌다는 말이 있다. 이 경우, 상대방을 사랑한 것이 아닌 상대방의 이미지와 사랑에 빠진 것에 가깝다. 사람 그 자체를 사랑할 경우, 상대방의 습관이나 행동 또는 생각이 안타깝거나 못마땅할 순 있어도 이 때문에 그 사람에 대한 애정이 식을 순 없다.

이미지 대신 사람 그 자체를 사랑하기. 사랑하는 상태는 무언가를 바라거나 기대하는 것이 아닌 상대방의 존재 자체에 대해 관심 있는 상태에 가깝다. 사랑은 호기심의 특성을 지녔기에 불안정적이고 예측 불가하다.

사랑은 호기심에 가깝기에 몇십 년 이상의 긴 지속시간을 가지는 경우는 드물다. 그 이후의 관계는 이성적 사랑보다는 가족적 사랑 또는 정에 가깝다. 이는 사랑에도 종류가 있음을 의미한다.


사랑과 나르시시즘

호기심의 성격을 띠는 사랑은 나르시시즘과 대척점에 있다. 이미 자신과 사랑에 빠진 이가 어떻게 다른 사람을 사랑할 수 있겠는가. 나르시시즘에 빠진 이는 이미 자신에 대한 호기심으로 가득 차 있다. 자아 과잉의 상태에서는 타인이 들어올 공간은 없다.

사랑은 좋아함과는 분명히 다르다. “예쁜 외모를 좋아함이 상대방을 사랑하는 것을 뜻하진 않는다. 외적인 아름다움을 가진 이는 세상에 넘쳐난다. 하지만, 난 그들이 비 오는 날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저녁을 먹고 나서 그 사람은 저녁을 대충 때우진 않았는지 걱정하지 않는다.

외적인 끌림과 성적 반응이 사랑과 완전히 구별되는 특징이 있다면 바로 이것이다. 전자는 이미지를 소비함에 그치지만 후자는 사유를 생산해낸다. 나아가 주의해야 할 점은 생산되는 그 사유가 '다양함'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특정 상황에서만 상대방이 떠오르거나 상대방의 특정 부위나 모습만이 생각난다면 이는 사랑과 다르다고 볼 수 있다. 오히려 원함에 가깝다. 사랑은 원함보다는 자석에 가깝기 때문이다. 자석은 이성적 판단과는 상관없이 본질적으로 상대방에게 나아간다.

이렇게 본다면 사랑은 생각의 일어남을 유도하는 특성을 지녔다고 볼 수 있다. 과잉된 이미지들을 소비하는 현 사회문화 속에서 생산의 역할을 하는 사랑은 여러모로 섞이기 힘들어 보인다.

나르시시즘은 상대방과 나의 관계를 수직적 관계로 나눈다. 상대방보다 우월하지 않은 자신은 나르시시즘에 맞지 않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나르시시즘은 상대방을 온전히 경험하지 못한다. 자신의 수직적 지위가 침해당함을 우려하기 때문이다. 온전히 자신을 놓지 못한 채 상대방을 경험하려 할 때, 상대방을 자신의 관점과 틀에서만 경험하게 된다. 이는 왜곡된 경험과 사유로 이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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